
티빙-웨이브 합병에 숨겨진 K-미디어 방정식
최근 한국의 미디어 산업에 큰 변화를 예고하는 합병이 승인되었습니다. 지난 10일, 공정거래위원회는 티빙과 웨이브의 기업 결합을 조건부로 승인하여 국내 OTT 서비스의 1위와 2위가 통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언론들은 두 회사의 합병을 ‘넷플릭스 대항마’라고 표현하며 미디어 시장의 지각 변동을 예측하고 있습니다.
티빙 웨이브 합병
아래의 시장 점유율 수치만으로 보면, 합병이 성사될 경우 넷플릭스의 33.9%에 가까운 33.5%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합산 수치에 불과합니다.

합병이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을 달성해야 할까요? 티빙과 웨이브의 합산 영업 손실은 1천억 원대에 이릅니다. 합산 가입자를 유지하면서 이익으로 전환해야만 '성공'이라고 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준의 성공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뒤에서 분석하도록 하겠습니다.)
2019년 웨이브 탄생
한국 OTT 산업을 돌아보면 크게 두 가지 변곡점이 있습니다. 2019년, SK텔레콤의 옥수수와 지상파 3사의 푹이 합병하여 '웨이브'가 탄생하였습니다.
이 당시 SK는 수천억 원 규모의 재무적 투자자까지 유치하며, 2024년 IPO를 목표로 500만 명의 가입자와 5,000억 원의 매출이 가능하다고 밝혔습니다.

2019년 당시 넷플릭스의 한국 앱 이용자는 약 300만 명이었습니다. 2025년에는 넷플릭스의 규모가 4배 증가했으며, 웨이브는 자신들이 설정한 목표의 70%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2022년 KT 티빙 투자
두 번째 변곡점은 2022년 KT가 티빙에 대한 투자를 결정하면서 티빙의 지분 13.54%를 확보한 것입니다. 이 당시 설정된 기업 가치는 현재 반토막이 난 상황입니다.
국내 미디어 산업에는 두 가지 주요 세력이 존재합니다. 콘텐츠 분야에서는 CJ와 지상파 방송사가 있으며, 콘텐츠를 유통하는 플랫폼으로는 SK텔레콤과 KT와 같은 통신 회사 그룹이 있습니다.
통신회사의 OTT 포기
2019년과 2022년 두 시기를 거치면서 국내 통신회사들은 자사의 OTT 소유를 포기했습니다. KT는 통신회사로서 콘텐츠 스튜디오 사업을 선택한 반면, SK는 웨이브에 대한 투자 외에는 특별한 변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KT의 합병 이후 공격적인 제휴 전략을 통해 네이버와 협력하였고, 프로야구 독점 중계를 내세운 티빙의 가입자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반면, 웨이브는 지상파 콘텐츠의 영향력이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SK텔레콤 이외의 제휴 모델을 찾지 못해 가입자 규모를 더 이상 늘리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2024년 재무적 투자자들에게 IPO를 약속했던 웨이브의 대주주인 SK스퀘어는 미디어 플랫폼의 필요성보다 재무적 위험을 낮추어야 했기 때문에 웨이브와 CJ ENM의 합병을 위한 협상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지상파들의 넷플릭스 개별 계약
이런 분위기를 감안할 때, 지상파 방송사 중 일부는 넷플릭스와 수천억 원 규모의 콘텐츠 구매 계약을 체결하며 웨이브의 주인 역할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지난 6년간 넷플릭스를 견제하는 데 두 진영 모두 실패하였고, 통신, 쇼핑, 콘텐츠 분야의 우호 세력을 규합한 티빙만이 프로야구 독점에 힘입어 규모를 키운 상황입니다.
1위 IPTV를 넘보는 티빙
티빙과 웨이브가 합병하면, 한국의 통신회사들은 OTT 플랫폼의 재무적 투자자로 남게 되며, 유통 플랫폼으로서 티빙의 최대 주주는 CJ ENM이 됩니다.
티빙이 1위 IPTV를 초월하는 콘텐츠 유통 플랫폼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티빙과 웨이브의 가입자를 단순히 합산하여 1천만 명을 유지한다면!)
이 점이 티빙의 두 번째 주주인 KT가 이 합병에 도장을 찍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이는 주인 없는 회사인 KT의 미디어 전략에서 발생한 실책입니다. KT는 플랫폼이 아닌 위험도가 높은 콘텐츠 제작 사업인 스튜디오 지니를 선택하고, 통신회사가 만든 OTT 서비스를 포기했습니다.
이 시기에 미국의 최대 통신회사인 버라이즌은 워너 브라더스를 매각하고 콘텐츠 사업에서 철수합니다.
미국 vs 한국 미디어
조금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현재 미국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디어 산업 현황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1 TV 공략의 차이
한국과 미국 미디어 시장의 가장 큰 차이는 'TV'입니다. 스트리밍 산업은 기존 레거시 미디어의 주력 매체인 TV를 둘러싸고 가입자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지난 5년 동안 미국의 케이블 TV 가입자는 꾸준히 감소하였고, 이로 인해 디즈니, WBD, 파라마운트 등 방송 네트워크들은 수익 하락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방송 네트워크의 수익 하락을 방어할 만큼 레거시 미디어의 OTT(디즈니+, MAX 등) 수익성은 충족되지 않고 있습니다.
#2 Slow Death 하는 한국 레거시 미디어
이런 현상과 달리 한국의 미디어 시장에서 IPTV 가입자 수의 하락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지상파 방송사와 CJ의 광고 수익은 적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소위 '슬로우 데스(slow death)'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미국 시장에서는 레거시 미디어와 스트리밍 서비스 간의 전면적인 경쟁이 벌어졌지만, 한국 시장에서는 IPTV를 유지하면서 OTT의 성장을 도모하고자 했기 때문에 경쟁이 제한적이었습니다. OTT 서비스들은 TV 전용 상품을 별도로 제공하고, IPTV는 높은 가격에 방송사 SVOD 상품을 별도로 판매하는 등 몇 년간 모호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3 독특한 OTT 회사 분리와 지분 나누기
미국의 레거시 미디어들이 자사의 OTT 서비스를 기업의 사업 부문으로 추진하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콘텐츠 기업들은 이를 외부로 분리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티빙과 웨이브의 주력 콘텐츠는 자사 방송국에서 제작한 콘텐츠들입니다. 콘텐츠 거래 대가는 본사에 제공되며, 본사는 유통 수익을 확보합니다.
또한, 오리지널 콘텐츠의 제작 생태계에서도 티빙과 웨이브가 제한적으로 주도함으로써, 이들 플랫폼은 단순히 유통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에 그치고 있습니다.
#4 가입자 유지 그러나 slow death IPTV
미국의 케이블 TV를 주도하는 컴캐스트와 차터 등 유통 플랫폼들은 코드 커터를 방지하기 위해 스트리밍 번들 상품과 CTV 셋톱박스 등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의 IPTV 플랫폼은 OTT 서비스를 보다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경쟁적으로 셋톱박스를 개발해왔으며, 이로 인해 지난 몇 년간 자신들의 주력 수익 모델인 VOD 사업과 홈쇼핑 수수료가 감소했습니다. 콘텐츠 분야와 마찬가지로 유통 플랫폼 역시 '천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OTT는 글로벌 경쟁
2019년 이후 6년 동안 미디어 시장을 가장 크게 흔들어 놓은 키워드는 '글로벌'입니다. 넷플릭스와 디즈니+가 한국에 진출했지만, 이미 한국의 미디어 시장은 글로벌 경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티빙과 웨이브는 지난 6년간 글로벌 확장을 위한 어떤 움직임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티빙과 웨이브에 투자한 지상파 방송사, CJ ENM, JTBC 등 모든 콘텐츠 기업은 넷플릭스와 협력하여 자사의 방송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수억 명의 글로벌 가입자를 대상으로 한국 콘텐츠가 수출되는 가운데, 티빙과 웨이브는 자사 가입자 500만에서 700만 명을 대상으로 오리지널 콘텐츠를 상영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현실 속에서 시청자들은 넷플릭스를 통해 확장하는 K-콘텐츠의 위력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아래 표를 보면 한국에서 인기리에 상영된 후 몇 주 안에 글로벌 히트 수를 확대하는 K-콘텐츠의 시청 추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시청자들이 글로벌 시청률의 마중물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거시미디어의 OTT 전략 : 분리 or 통합
넷플릭스, 아마존, 유튜브가 레거시 미디어를 위축시키면서 글로벌 사업자들도 변화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2024년, 컴캐스트는 자사의 케이블 네트워크와 OTT 서비스를 분리하기로 결정하였고, 최근 WBD도 스트리밍, 스튜디오, 그리고 글로벌 방송 네트워크를 분리하기로 하였습니다.
레거시 미디어와 OTT를 분리하여 향후 인수 합병에 대비하고, 스트리밍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한편, 디즈니는 미국에서만 서비스 중인 훌루의 지분을 2025년까지 100% 확보할 계획입니다. 이는 컴캐스트로부터 지분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또한, ESPN을 독립적인 OTT 서비스로 출범시켜 디즈니+, 훌루, ESPN을 묶은 번들을 주력으로 내세우는 '올인원 OTT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분리와 통합이라는 두 가지 전략은 레거시 미디어가 처한 조건에 따라 추진되지만, 향후 콘텐츠 기업 간의 인수 합병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모든 미디어 기업(콘텐츠 및 플랫폼 기업들)이 OTT 플랫폼을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IP 사수 전략
그리고 이들이 회사를 분리할 때 핵심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바로 'IP'입니다. WBD는 HBO와 워너 브라더스의 제작 역량을 스트리밍 사업과 통합하려고 합니다. 즉, 분리되는 스트리밍 회사를 단순한 유통 회사로만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한국의 미디어 시장은 콘텐츠 분야와 플랫폼 분야가 각자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지분을 나누어 OTT 플랫폼을 구축하였고, 이제는 하나의 OTT로 통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분 관계는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이는 전 세계 미디어 산업에서 독특한 기업 구조입니다.
합병 법인 : 복잡한 지분구조 문제
콘텐츠와 플랫폼의 이해관계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으로 외형은 커질 수 있지만, 주주사들의 각기 다른 지향점이 통합 OTT를 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통합 OTT의 향후 방향은 어디일까요?
스마일커브
스트리밍 시장에 대한 '스마일 커브(smile curve)' 논리가 있습니다. 이익과 규모를 축으로 글로벌 스트리밍 회사들을 나누어 보면, 이익과 규모가 모두 큰 기업(오른쪽)과 이익 규모는 크지만 틈새 시장을 가진 기업(왼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표에 따르면 디즈니는 넷플릭스의 위치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 아래의 회사들은 정체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용자가 많을수록 매출이 증가하고 콘텐츠의 질과 양이 모두 향상될 수밖에 없지만, 이미 시장에서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넷플릭스와 디즈니와 같은 대형 스트리밍 서비스로 인해 하위 스트리머들은 구독자 수와 구독자당 수익 간의 선순환 구조를 형성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유일한 길 : 글로벌
이러한 시장에서 콘텐츠의 위력은 강하지만, 가입자 수가 제한적인 아시아의 한국 시장에서 경쟁하는 통합 OTT가 생존할 유일한 길은 '글로벌'입니다.
2019년, 2022년, 그리고 2025년, 3년 주기로 변화하는 한국 미디어 산업의 변곡점마다 'K-OTT'라는 이상한 논리가 등장하여 미디어 산업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이해관계자들의 재무 위험만 낮추는 데 그치고 있습니다.
미디어 산업 관계자들이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에 대한 시각을 넓히기를 기대합니다.
jeremy79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