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링박스(slingbox)' 를 아시나요? 퇴장하는 옛날 기술
유투브와 넷플릭스가 동영상을 지배하기 이전 시대는 지상파, 케이블이 주인공 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TV는 거실에서만 시청할 수 있는 단말이었죠.
2002년 스포츠 광팬이었던 캘리포니아의 형제는 “자신의 지역에서 방영하는 메이저리그 경기를 다른 지역이나 다른 국가로 여행을 가서도 볼 방법은 없을까?” 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괴짜 형제의 아이디어로 개발된 슬링박스
2004년 ‘슬링미디어’ 라는 스타트업을 설립한 두 형제(Blake와 Jason Krikorian)는 2005년 ‘슬링박스(slingbox)’ 를 개발합니다.
집으로 들어오는 아날로그TV 신호나 케이블TV 셋톱박스 선을 슬링 박스 튜너에 꼽고 공유기에 연결된 랜선과 슬링박스를 연결하면 IP를 통해 콘텐츠를 외부로 재전송합니다. 슬링박스 PC 플레이어 (초기 버전) 를 통해 어디에서나 거실의 TV채널을 그대로 시청할 수 있습니다.
뭐 이렇게 복잡한 기술이 있나요.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보면 될것을! 하시겠지만 17년전인 2005년 으로 돌아가보신다면 이 당시에는 가히 혁명적인 기술이었습니다. 넷플릭스가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한 시기가 2007년이었습니다.
케이블, 위성방송 가입자라면 250불(당시 이 금액이라면 매우 비싼 가격) 을 내고 어디에서나 콘텐츠를 즐길 수 있었고 (place shifting) , 지금은 사라진 기술 용어이지만 N-Screen의 시초였습니다.
당시의 언론들은 일제히 ‘케이블을 죽일 수 있는 혁신적인 오버더 탑 기술인데 차라리 케이블, 위성방송은 이 기술을 끌어 안아야 한다’고 평가했습니다.
Place shift, n-Screen 의 원조
미국 처럼 스포츠, 뉴스 등 지역 콘텐츠가 강력한 매체로 자리잡고 있는 미국에서 슬링박스는 시청자들의 엄청난 인기를 얻게됩니다.
슬링박스 제품도 SD 에서 HD 신호 수신과 케이블TV 신호 입력 등 스트리밍 품질을 높여나갔고, PDA (이런 단말도 있었죠) 에서 모바일, CTV 까지 콘텐츠를 시청할 수 있는 플레이어 어플리케이션 종류를 늘려갔습니다.
5천억이 넘는 금액에 인수
슬링미디어는 2007년 당시 위성 네트워크인 Dish의 모회사 였던 Echostar에 무려 3억8천만 달러에 인수됩니다.
그리고 2011년에는 한국의 스카이라이프가 슬링박스의 국내 유통을 시작하게 됩니다.
콘텐츠 소유자인 방송 채널들에게는 슬링박스는 매우 ‘파괴적 기술’ 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메이저리그 협회가 슬링박스를 강력하게 비판했고 (하지만 소송 까진 진행되지 않음), 실제 FOX는 저작권 위반 소송을 진행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지상파들은 슬링박스의 도입을 강력하게 비난했는데요, 별도로 수익화할 수 있는 N-Screen 사업을 놓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사적복제’ 로 저작권 위반 소송을 극복
미국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중요한 판결을 하게 됩니다. 슬링박스를 통해 집 밖에서 실시간 방송을 시청하는 행위는 저작권 침해가 아니라 ‘사적인 이용을 위한 복제’ (사적복제) 라고 규정하여 저작권 위반이 아니라는 결정입니다. (한국에서는 소송까지 가지 않아서 이 결론을 내지 못합니다)
페이센스의 원조 : 슬링박스 호스팅
그리고, 슬링 미디어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슬링박스를 수백대 구매해서 이를 마치 데이터 센터 처럼 쌓아놓고 지역 케이블TV와 연결하여 월 100불 이용료를 받고, 타 지역 또는 외국의 고객들에게 판매하는 '슬링박스 호스팅' 사업을 시작하는 사업자들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업은 한국에도 추진하는 여러 회사들이 있었지만 결국 포기되었죠.)
불법 재송신 임을 내세워 이 사업들을 막았는데, 이는 마치 최근 OTT들의 계정을 나누어서 팔았던 '페이센스' 모델의 원조로 평가할 만합니다.
위성방송과 번들링
미국의 위성방송 Dish는 이 슬링박스의 기술을 자신들의 위성 셋톱박스에 기본 내장 시키고 특히 미국에서 당시 TV시청 방식으로 인기가 높았던 DVR (셋톱박스에 방송채널을 저장하여 보고싶을 때 보는 기능) 셋톱박스와 연동했습니다. 실시간 채널 뿐 아니라 셋톱박스에 저장된 드라마 등도 외부에서 시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슬링박스가 유료방송에 번들링 된 것이죠.
하지만 인기는 식어가고 결국 중단 선언
하지만 이 기술은 넷플릭스 등 스트리밍이 빠르게 진화하면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2017년 기준 200만대 정도 판매되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특히 업계의 관심과 지상파들의 저작권 위반 주장 등 노이즈의 수준에 비해 전혀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2015년 Dish는 슬링박스의 ‘Sling’을 브랜드로 차용하여 자체 OTT 서비스로 ‘Sling TV’ 를 출시합니다. vMVPD (가상 IPTV)로 분류되는 이 서비스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결국 Dish는 슬링박스의 기술 지원 및 서비스 운영을 중단키로 결정합니다. 한달 뒤인 11월에 더 이상 슬링박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슬링TV는 별개입니다.)
스트리밍 기술의 개척자이고, 5천억이 넘는 금액으로 인수되었던 슬링미디어는 VCR, 카세트테이프 와 같은 사라진 기술의 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슬링박스를 셋톱박스와 TV 사이에 복잡한 연결 과정이 필요하고 별도의 플레이어를 설치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OTT의 이용 편리성을 따라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슬링박스가 영향을 준 기술들
슬링박스는 퇴장하지만 이 기술은 미디어 기술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미국의 주요 유료방송 플랫폼인 케이블TV의 업스트림 네트워크 속도에 대한 기술 개선(DOCSIS 기술 등) 을 촉진 시켰습니다. 그리고 ‘TV Everywhere’ 라는 레거시 미디어 진영이 OTT와 대응하기 위한 N-Screen 전략에 동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라이브 스트리밍 기술들의 시초이기도 합니다.
슬링박스는 스트리밍 기술의 지름길을 제공한 것입니다.
슬링박스가 퇴장 하는데 17년이 걸렸습니다. 이 속도는 이용자와 빠르게 진화하는 새로운 기술이 결정한 것입니다. 슬링박스 목록에 포함될 다음 기술은 무엇일까요?
jeremy797@gmail.com